<초록은 어디에나> 리뷰

2025. 4. 11. 22:29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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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읽은 트로피컬 나이트 이후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설을 찾았다.

 

초록과 식물, 비뚤한 일러스트의 조합에 이끌려 책을 골랐다.

임선우 작가의 책은 이번에 처음 접했는데 작가가 슬픔을 전하는 온도가 부담스럽지 않아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소설은 그 슬픔이 더 깊고 진하게 표현되어 책을 읽으면서 정신이 더 고갈되는 느낌이 있는데, 이 소설은 완전한 타인에서 시작된 짧고 옅은 만남으로 각자의 슬픔에 대해 상대에게 나열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막중한 책임감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 애정 과 같은 후덥지근한 관계가 없어 오히려 숨통이 트였다. 또한 내가 우리가 비유와 은유로 사용하는 것들을 물리적 공간으로 끌어와 표현하는 기법이 쓰여 좋았다. 가령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쓸모를 상실한 인간, 벌레 '같은' 인간에서 진짜 벌레가 된 것처럼 말이다.

 

소설의 좋은 부분을 몇가지 뽑자면,

 

  • 개그코드

소재는 여타 현대문학과 같은 비슷한 것들이 쓰인다. 등장인물들은 슬프고 결핍이 있어 어딘가에 깊이 의지하고 있는 나약한 인간 군상들이다. 하지만 왜인지 그 우울이 나를 숨막히게 하지 않는다.

윗집에 사는 낙타인간과 장국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야자나무, 그리고 작가가 이전에 키우던 선인장 김조한. 이 뜬금없는 출현과 이들의 조합이 웃기고 소설을 읽는 내내 재미를 주었다. 의도인지 의도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저 상황에서 누구도 그것에 대해 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게 좋았다. 비과학적인 엉뚱한 상황이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오는 자유가 느껴졌다.

 

  • 연애 없는 이야기

연애 이야기 혐오자는 아니다. 다만 불안정한 연애 소설을  읽을 때 주변이 습해지는 기분은 든다. 사랑이라는 관계로 불안정하게 묶인 이들이 서로의 결핍에 얽혀들어 서서히 썩어가는, 더 악화되는 인물의 묘사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 한 구석도 함께 무거워지곤 했는데 그러한 부담이 없어 좋았다. 소설 전반이 우연히 마주한 사람과의 교류를 다룬다는 점이 좋았다.

 

  • 단절되어있는 듯 묘하게 이어져 있는 세가지 다른 이야기

<초록 고래>에서 자살하기로 마음먹으면 낙타로 변하는 유미씨는 커튼을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여자와 슬프면 돌을 뱉는 여자에 대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의 연장선처럼 <사려깊은 밤, 푸른 돌>은 애인 영하가 잠적한 뒤 슬플 때 돌을 뱉는 선영과 그 돌을 훔쳐 억눌러온 슬픔을 분출하는 희조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오키나와에 눈이 내렸어>에서는 오사카로 금괴 밀수를 제안하는 전 연기 연습생 영하와 전 축구선수 주영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슬픔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 다른곳에서도 같은 형태, 같은 이름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르게 표현된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어진듯 끊어진 세가지 이야기

 

 

나에게 초록은 따뜻한 슬픔의 색. 차고 단단한 파랑의 슬픔에 노란빛이 한 줄기 섞인 푸르름. 
초록은 어디로 가는 법이 없다. 초록은 어디에나 있다.

 

나에게 초록이란 치유, 회복의 이미지이다. 압박 받거나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 나는 어떻게든 근처에서 초록을 찾아서 나를 회복하려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고른 이유도 제목에 '초록'이 들어가서였는데, 내가 생각하는 초록이 작가가 묘사하는 초록과 맞닿은 부분이 있다고 느껴져 가장 마음에 남는 글귀이다.

 

 

 

개인적으로 웃겼던 부분

여자분은 어디 가셨어요? 집 안을 둘러보며 내가 물었다. 여자분이요? 이 집 주인이요. 단발머리에 키도 크고 눈도 큰 여자분. 아, 그거 저예요, 하고 낙타가 대답했다. 제가 어쩌다 한 번씩 낙타로 변하거든요. 어떻게 하면 사람이 어쩌다 한 번씩 낙타로 변하나요. 내가 되묻자 낙타는 그러게요, 하면서 대충 얼버무리더니 말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는지 집주인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장국영이 사라져서요. 장국영이 사라졌다고요?
아, 제가 기르는 야자나무 이름이 장국영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10년 된 오래된 녹보수와 함께 지내면서 들었던 생각과 비슷해 이 구절에서 많이 웃었다.

추신: 녹보수는 어느덧 사 년째 나와 함꼐하고 있다. 녹과 보수, 투박한 단어들의 조합이 떠오르는 촌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녹보수가 '녹색 보석 같은 잎을 가진 나무'의 준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녹과 보수가 아니라 녹색 보석이었구나. 녹보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